자서전을 낸 9명의 어르신이 전하는 ‘나의 삶, 나의 노래’
인천시 동구는 세월도 비켜간다. 한때 신식문물의 발상지, 수도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해오던 동구는 인천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라는 오명을 쓰고 오롯이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동구에서 수 십 년 살아온 어르신들이 삶 속에 동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람냄새 풀풀 나는 동구 송현시장 길목 ‘동구노인문화센터’에 꽃냄새가 진동한다. 9명의 어르신들이 책을 냈단다. 가족들은 부모님의 사랑만큼 크고 화려한 꽃다발을 안고 출판기념회장을 찾았다.
정치인이나 유명인사들은 가끔 ‘출판기념회’를 연다. 출판기념회가 책을 소개하는 자리라기보다 인맥을 쌓고 후원금을 챙기는 자리가 된 지 오래다. 지난 18일 열린 9명의 어르신 출판기념회에는 유명인사도, 후원금도 없는 조촐한 출판기념회였다. 소박한 삶을 살아온 우리네 어머님들 이야기가 한권의 책으로 출간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배곯던 시절 매운 시집살이 거쳐 자식 키우며 미련하게 살아온 질박한 삶을 연필로 꾹꾹 눌러쓴 자서전을 아들 딸 불러놓고 수줍게 펼치는 행사를 소개해 본다.
안선숙(70세), 장우조(73세) 최귀순(77), 김순분(64세), 양종숙(67세), 조순자(71세), 정지순(80세) 최능희(77세), 서정림(80세) 9명의 어르신들은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굴곡진 삶을 주름진 손으로 써 내려갔다. 1년간 밤새가며 지우고 다시쓰기를 반복하며 만든 돈으로 살 수 없는 책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1년간 독서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9분 어르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쓰는 수업을 진행했는데요. 한 분의 낙오자 없이 1년간 자서전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서툴지만 우리네 어머니들의 이야기입니다.” 권지연 센터장은 ‘나의 삶, 나의 노래’라는 출판기념회를 이렇게 소개했다.
9명의 어르신들 대부분은 시집을 와서 쭉~ 동구에서 살아오셨다. 자서전에는 한사람의 인생이야기를 뛰어넘어 인천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 시절 나는 전쟁이 뭔지 몰랐다. 너무 무서워 산에 올라가 숨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미도 앞바다에 군함이 들어오더니 월미도 산을 폭격하기 시작했다.’라고 월미도 상륙작전에 관한 역사적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기도 하고(최기순 어르신의 ‘백합꽃 인생’) ‘남편과 함께 인천에 올라와 장사에 힘썼다. 물을 우물에서 길어다 먹으며 살았다. 연탄을 피우다보니 연탄재가 골목골목 쌓여있었다.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송림국민학교 내리막길을 내려오다 학교 빗장문에 이마를 부딪쳤다. 아이를 데리고 평화병원을 갔다. (중략) 그때는 길마다 노점 장사가 많았다. 지성소아과 사거리, 배다리 삼거리에는 다양한 장사가 많았다. 나도 과일 리어카를 끌고 배다리 삼거리에서 과일과 수박을 한 차씩 가져다놓고 팔았다.’와 같이 사라진 인천의 과거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도 싣고 있다.(정지순 어르신의 ‘자수민 장미꽃’)
“어릴 적 공부도 하고 글도 쓰고 싶었지만 집안 일 돕느라 할 수가 없었어요. 공부가 너무 좋아 밥하다 부지깽이로 부엌바닥에 글을 쓰고 소당서 떨어지는 물로 부뚜막에다 글씨를 썼습니다. 이 나이에 실컷 글을 써봐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변호사가 꿈이었다는 최능희 할머니는 1년간의 작업이 꿈만 같았다고 말한다. “태평양바다가 종이라면 꽉 차게 글을 쓰고 싶었다.”는 어르신은 게다짝신고 일본 언문책과 산수책을 책보로 둘둘 말아 학교 가던 길을 매일 가고 싶었다며 당시 공부에 대한 목마름을 말씀하신다.
평균나이 74세 어르신 9분 모두 공부가 한으로 맺힌지라 이번 출판기념회가 남다르단다. “내 이야기 보따리를 1년간 풀고 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아요. 황홀하고 행복했어요. 쓴 글을 읽어보니 고통과 증오, 후회만 가득하네요. 또 기회가 저에게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기쁨과 평화 즐거움만 표현하고 싶습니다.”라며 양종숙 어르신은 말한다.
행사를 지켜보던 자식들의 눈가가 촉촉해져 온다. “어머님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옆에서 본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책 속에 어머님의 희생한 삶이 오롯이 새겨져 있어 마음이 찡하네요. 이젠 가족을 위한 희생의 삶이 아닌 본인의 삶을 사셨음 좋겠습니다.”라며 김순분 어르신 막내아들은 말했다.
출판기념회는 저자소감과 가족들의 소감을 이야기하며 조용히 진행되었다.
조순자 어르신은 “어린 시절을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고향 인천은 봄이 예뻤죠. 창문만 열면 풀 향기가 가득했고, 앞마당에 백합꽃과 함박꽃이 뾰족하게 나오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송림동에 현대극장에서 남편과 영화 한 편 보는 것이 매운 시집살이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극장구경 다녀와서 눈물 쏙 빼게 시어머니에게 혼났지만...사업하던 남편 공장이 부도나고 저는 시장바닥에서 조개를 까서 팔아보고 선인재단서 매점도 하고 양품점, 세탁소도 해보고 고추방앗간도 했지요. 돌아보면 긴 터널이었지만 그래도 극복하면서 이렇게 살아왔네요.”
정지순 어르신 큰아들은 이곳 출판기념회장에서 초등학교 동창 두 명을 만났다. 변하지 않은 동구 모습마냥 그네들의 모습도 변함이 없었는지 머리카락 희끗한 중년은 한눈에 동창을 알아보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우리네 어머니는 묵묵히 늘 이곳을 지키고 계셨다. 어머니가 살아온 인천은 힘들 땐 조개를 까며 연명해주던 젖줄기이기도 했고 연탄재 가득한 뒷골목 그곳엔 철없이 뛰놀던 자식들의 생채기를 남긴 야속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인천은 어르신들 삶 속에 녹아있었다.
세월도 비켜간 동구 골목에 한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미와 그 이야기에 박수쳐주는 자식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이현주 객원기자 o7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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